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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화장을 진하게 한 단발머리 여자한테 나는 다가갔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보석과도 같았다. 그녀가 귀에 단 것이 다이아몬드 보석 귀걸이가 아닌, 그저 싸구려 귀걸이라도 어울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고, 이윽고 동네 꽃집에서 산 조그만 싸구려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나는 그녀에게 내 마음을 진솔되게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꽃을 이내 내던져 버렸고, 심지어는 짓밟아서 완전히 뭉게 놓아버렸다. 그리고, 내 마음에 크고 쓰라린 상처를 남겨버렸던 그 말을 꺼내들었다.

"야, 닥쳐. 니 입에서 똥내 나거든?"

그 말만이 내 머릿속을 그저 뱅뱅 맴돌았다. 날 받아주었다면, 정말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해주었을 여자가 매정하게 내게 한 말이었다. 그저 부질없는 짝사랑이었을까...

"너무 그 여자애 생각만 하지 마. 너한테도 좋은 짝이 있으니까."

나는 옆에 친구녀석이 온 줄도 모르고 계속 그 말만 되뇌이고 있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세린'. 어릴 때부터 담장 하나를 두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물론 지금은 남자들보다도 훨씬 친하게 지낸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은 학교에 다녔고, 거기에 같은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고 있으니,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세린은 내 자리 바로 옆에 있는 창문을 살며시 열었다. 그리고는 교복 와이셔츠의 팔을 걷어붙였다. 가늘고 굴곡진 팔에 햇빛이 살짝 내리쬐자 잡티 하나 없이 뽀얀 살결이 눈에 들어왔다. 세린은 이윽고 창가에 슬쩍 기대고는, 한쪽 다리를 꼬고 그 생기넘치는 호박빛의 눈으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옅은 미소를 띄었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실연을 기정사실화 하는 세린의 말에, 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희망을 짓밟아버리는 것만 같은 그녀의 말에 허탈감과 함께 덧없는 분노가 찾아왔지만, 이내 삭혀내고는 이왕 끝난 거,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냉정히 생각해보려 애써보았다. 그러나, 짝사랑녀는 어느새 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이내 뗄레야 뗄 수가 없었다.

"뭐? 너가 그 예쁜 여자애를 알기나 해? 잘 알지도 못하는 게 어디서 코웃음질이야?"

내가 궁리 끝에 짝녀를 위해 한 증오섞인 변명이었다. 그 말을 한 이후, 그저 이쁜 거 하나가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이 조금 들었지만, 나는 애써 내 짝녀를 변호해주려 노력했다. 괜히 튕기는 것일 수도 있다느니,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느니, 그 여자애는 나쁜 여자애가 아니라든지... 세린은 그 말을 묵묵히 그저 들어만 주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윤기나는 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펄럭거렸다. 호박빛이 나는 그 눈동자는 나를 줄곧 바라보다가, 짝녀를 변호해주기 시작하자 풀이 죽은 것처럼 생기를 살짝 잃었다.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렇게나... 너한테 중요한 여자였구나..."

"미안해... 미안.. 내가 괜한 소리를 했지..."

"하... 미안해......"

손발을 부르르 떨다 못해 이까지 악문 그녀는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 조용히 교실 밖을 나섰다. 뭔가 내가 크게 잘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꼴 좋았다. 내 짝녀를 그따위 지나가는 인연으로 본 건 백번 죽어도 마땅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누군가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로 앞자리에 앉는 가영이었다. 먹물로 칠한 것만 같은 긴 생머리에, 머리핀 하나를 살며시 꽂아 놓은 듯한 그녀의 머리는. 바로 뒷자리에 앉은 나에게는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이 하여금 들게 했다. 가영은 원래 말이 도통 없는 성격이었다. 뭘 물어봐도 지그시 고개만 살짝 끄덕이거나, 살짝 눈짓만 하는 그녀가 말을 하는 건 도통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가영은 세린이 나간 교실 문 밖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사과해."

"...뭐?"

"사과 하라고."

나는 가영이 네모난 검정 반무테안경 속으로 보이는 삭막한 회색 눈동자를 꿈뻑이며, '말'이란 걸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두 귀로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처음 들은 말이 '사과해'라니. 기분이 잔뜩 더러워졌지만, 말 한마디 않던 과묵한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으니, 뭔 뜻이 있으리라고 보고는 세린을 조용히 찾아 나섰다. 가영은 그런 나의 뒷모습에 눈을 떼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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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이 | 작년 2월에 작성된 돌림소설의 리메이크 작입니다. 예전 공저자 분들께서 작성하신 부분은 삭제 및 다르게 전개하였으니, 그저 평행우주로 봐 주시길... ㅎㅎ 2016/01/03 05: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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