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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에게 연이어 보고된 것은, 공화국군의 쾌속 진격과 잇따르는 영주 및 제후들의 적전도주 및 무저항 항복, 그리고 참담한 패전의 소식 뿐이었다. 황제에 대한 수십 여년의 신의와 충성을 저버리고 공화국군에 항복은 커녕, 오히려 동조하여 패전 이후 한몫 챙겨보려는 철새와도 같은 자들도 있었고. 이 기회에 아예 독립하여서 제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영주들 또한 많았다. 얼마 되지 않는 황제에게 끝까지 충성하던 충신들과 그 휘하의 부대들은, 이곳저곳에서 흩어져 분전을 펼쳤지만. 그마저도 그만 각개격파되어 버렸다. 이제는 적들의 횃불 떼가 궁전의 황제가 육안으로 똑똑히 볼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것이었다. 상륙일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첫 보고 이후로 단 다섯 시간만에 공화국군이 수도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친위대에서도 탈영병이 속출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황제가 믿을 것이라고는 지하에 있는 마법진 뿐이었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그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다급해진 황제는 경호병들을 대동하고 지하로 내려가서 마법진의 상태를 지켜보기 위하여 성큼성큼 지하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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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핀은 깨어났다는 자를 살펴 보았다. 그자는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은 잠에서 갓 깨어난 것마냥 살짝 풀려 있었다. 그래핀은 그녀의 머리를 두드려도 보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았고, 머리카락을 뽑아 보기도 하였다. 여자로 보이는 그 작자는 그래핀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뭔가를 시도해 보자, 괴로운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힘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눈은 풀리다못해 초점이 없다시피 하였다. 마법진을 통과하는 동안 생긴 일인 듯 하였다. 그래핀은 그녀와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자, 무언가 비책을 생각해 내었다.

"좋아... 세르티이스...던가?"

마법주문을 외우려던 그는, 자신이 그 마법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의사소통 마법(해당자에게는 해당자의 언어로 듣게 되고, 상대방 역시 해당자의 말이 상대방의 언어로 나오게끔 하는 마법)이나, 아주 오래전에 지나가듯이 배웠던 마법이었었고. 단 한번도 써본 적 없는 마법이었다.

"흐음... 가이얀에서 잡종 놈들이랑 부딪히는 녀석이나 이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세르티이나크. 벤 발라키!"

누군가 주문을 외치며 큼직한 나무 지팡이를 살짝 휘둘렀다. 그 지팡이의 끝에서 나온 빛은, 그 이세계 여자의 머리로 쏙 들어가더니, 어느새 그녀의 입에서는 우리네 말이 휙휙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어디에요....."

"....제발......"

그래핀은 어이없다는 듯 뒤를 바라보았다. 뒤에는 체구에 맞지 않게 길게 늘어지는 금실로 된 옷을 짜고, 황금빛 왕관을 쓴 인물이 큼직한 나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 있었다. 바로 황제였다. 그래핀은 깜짝 놀라다못해 기절초풍하여 바로 황제의 앞에 예를 갖추었다. 황제는 그런 그를 조용히 일으키고는, 이세계에서 온 그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피부는 창백해져 있었다. 피부색과 검은 머리숱은 마치 살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 요상한 검은 머리의 여자가, 저 마법진에서 건너왔다는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폐하."

"그건 그렇고... 이 마법진은 이동용 마법진이 아닌데, 어떻게 여기서 넘어왔다는 말인가.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래핀 공.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 적들이 코앞까지 닥쳐온 이 난세에 어쩌자는 겐가?"

"...죄송합니다. 하지만.."

"변명은 더 이상 듣기 싫네. 이 여자를 어떻게든 구워삶아서 저 벌떼같은 적들을 막아낼 궁리를 하던지, 아니면 마법진을 다시 세우던지 하게. 지금 나라의 존망이 걸린 상황에서, 정작 제 기능은 하나도 다해내지 못하는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마법진을 만들어내놓고, 나 마법사요 하면서 건진 게 겨우 이건가? 제대로 배워먹지도 못한 것이, 기본기 중의 기본기인 마법을 몰라서 쩔쩔매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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