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린은 가지 않으려고 버팅기다, 내가 그녀에게 진심을 담은 걱정을 해 주자, 그제서야 저항을 그만두고는 내 손을 더 이상 떨어지기 싫다는 듯 꼭 잡고 있었다. 광기어린 늑대와도 같던 그 눈동자도, 나긋나긋하던 그 모습을 할 때의 영롱한 호박빛 눈동자로 되돌아가 있었다. 두 명이서 발맞추어 계단을 되돌아오면서, 나는 그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린이한테 했던 행동에 죄책감이 크게 들었다. 따지고 보면 화낼 상황도 아니었다. 오히려 건드려서 미안하다고 하던 세린을 내쫓던 게 누구고, 사과하러 가 놓고는 그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박아놓았던 게 누구던가. 그저 날 매정하게 버린 그따위 여자를 위해서보다는, 차라리 지금 내 곁에서 서로의 손을 꼭 부여잡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지난날 동안 견디어 온 소중한 소꿉친구와의 우정이 훨씬 중요하다 여겼다.
"세린아, 미...어?"
교실로 돌아와서 제대로 된 사과를 하려던 찰나, 마치 우리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 가영이가 문간에 기대고 서서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살짝 띄고 있었다. 이어서, 세린도 따라 들어오자, 이내 미소는 다시 사라지고. 평상시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치마 주머니 속에 한 손을 넣고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세린은 가영이를 보고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세린과의 관계 회복에 도움을 준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뜻을 보이고 싶었다.
"아, 세린아. 가영이 덕에 너한테 사과하러 갈 수 있었어. 둘이 무척 친한 사인가 본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영은 교실 밖으로 조용히 걸어나갔다. 나는 멍한 눈으로 가영의 뒷모습만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세린이 입을 열었다.
"...우리 친한 사이 아닌데."
"..."
세린은 가영과는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고 하였다. 원래 말이 없는 아이여서 도통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여태껏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째서 그 때 말을 걸고, 뒤쫓아와서는 그토록 한 적도 없는 '감정표현'을 했던 것인가. 나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세린과 친하지도 않으면서, 옥상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또한. 교과서로 제정신이 되돌아오게 한 그 일은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
길었던 그날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밤에는 이제 해가 지고. 달이 어두워진 밤의 학교를 밝게 빛내고 있었다. 야간자습이 시작되자, 입결 성적이 좋던 나는 우등반으로 가게 되어서 세린과는 다른 교실로 배치되어서 떨어져 있게 되었다. 더구나, 우등반은 자정쯤에나 와야지 풀어주기 때문에. 10시면 보내주는 다른 반보다 더욱 늦게 끝났다. 하교할 때는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입학 이후 실시되는 첫 야간자습이라, 더욱 떨리는 마음이 가득했다. 세린은 우등반으로 가는 나를 배웅해 주며 말했다.
"우등반...이구나. 진작에 알았으면 좀 더 공부하는 건데..."
시험에 합격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우리 고등학교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고 중 하나였다. 나는 성적이 중학교 때에도 최고를 달리던지라, 큰 어려움 없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린만은 달랐다. 중3때까지만 해도 성적이 중하위권에 머물던 세린이,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올라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팔자 좋게 늘어져서 겨울방학을 보내는 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가려던 학교까지 따라오려 했던 듯 하지만, 그게 두어 달도 안 되는 시간동안 밥까지 걸러가면서 자신을 혹사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지 의아했다.
세린이 녀석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우등반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문에 달린 창문 너머로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숨죽여 스캔을 하고 있던 찰나, 칙칙해 보이는 검은 안경쟁이 범생이들 사이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여자가 보였다. 특유의 반무테 안경이 매력적이던 가영이였다. 수학의 정석과 개념원리 두개 모두가 그녀의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나처럼 그저 머리빨로 학교에 온 게 아닌. 진짜 노력파였다. 나는 소리라도 날 새라 조심스럽게 우등반의 문을 열었다. 자리는 거의 남지 않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점심시간 때의 일이 걸려서인지. 그 옆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또한 감독관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잠을 자려고 일부러 맨 뒤에 남아 있었던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아서 짐을 풀고, 대충아무 페이지나 책을 펼쳐 놓은 나는, 슬슬 얼굴을 파묻고 잠에 빠져들려 했다. 그런데, 빈 자리인 내 옆 자리에서 자꾸 누군가 볼펜으로 나를 자꾸만 거슬리게 툭툭 쳤다. 혹시 감독관일까 하고 나는 바짝 긴장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감독관은 없었다. 그런데, 내 시야에 갑자기 무언가 적힌 공책이 불쑥 나타났다.
[오늘 맞은 거... 아프지 않았어? 내가 좀 심했던 것 같아.. 미안해...]
어느새 내 옆자리로 옮겨온 가영이였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감독관이 있으니 일단 공책에 답장을 적어내었다.
-[아냐아냐,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해. 나는 너가 그때 정신차리게 해 주어서 오히려 더 고맙거든.]
[이해해주어서 고마워...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너도 우등반이야?]
[나도 너가 여기 있어서 깜짝 놀랐어. 그렇게 대단한 남자인 줄은 몰랐거든.]
-[하하;; 그렇게 대단할 것까지는...]
[우리 이제 같이 친하게 지낼래?]
친하게라.. 그러고 보니 세린은 가영이와 친하기는 커녕 말 한번 섞어본 적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은근 배려심 깊고 착한 가영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서먹하던 세린과도 친해졌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좋아! 까짓것 친구먹지.]
[고마워! 나 정말 뛸 듯이 기뻐!!]
[혹시 우리 집에 가는 길. 같이 가지 않을래?]
-[길이 다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남자랑 같이 있으면, 밤길에도 안심이라고!]
까짓것, 세린이와도 집에 같이 가지 못한다. 뭐 혼자 가는 것보다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 뭐.]
그렇게 자잘한 대화들이 한참 이어져 나갔고, 곧 자정이 되어 학교의 불이 꺼졌다. 나와 가영은 교문을 나와, 그저 주홍색 가로등 불빛만이 지키고 있는 밤길로 들어섰다.
©issess / build 212
Comment : 9
berryberry | 근데 묘사가 풍부하신거 부럽네요 ㅎ <br>저도 묘사 잘 썻으면 합니다.. 근데 이을 사람이 안보인드아! 2015/02/24 01:25:39
광덕이 | 이을사람이 오늘 오전 10시까지 안보이면 제가 후속편 강행합죠 ㅎ! 2015/02/24 01:43:21
berryberry | 저도 참가시켜주십쇼! 2015/02/24 01:44:12
카즈토 | 그렇게 세린의 집착이 시작되는데... <br>본격 얀데레!? 2015/02/24 01:48:50
berryberry | 그렇게 미래일기가 탄생ㄷ... 2015/02/24 01:49:24
카즈토 | 윳키♥ ㄷㄷ 2015/02/24 01:49:53
광덕이 | ㅇㅋ! 10시까지 안나타나면 베리베리 님이 이으세요!! 2015/02/24 02:16:42
berryberry | 부족하지만 노력해보겟슴다! 2015/02/24 02:17:18
서으니기여어 | 순애물에 다른 루트라니?! 2015/02/24 11: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