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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to War - 1

1919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루어진 치욕적인 강화 조약은 전 독일국민의 분통을 터뜨렸다.

독일인들은 1914년의 개전 순간, 자국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생활이 조금 궁핍해져가긴 했어도 영프 원수들은 우리의 국토를 밟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러시아와의 동부 전선에서는 1916년의 절체절명의 위기. 브루실로프 공세 때의 고난도 이겨내고 결국 승리하지 않았던가.

잘 싸워오던 때에 발표된 갑작스런 항복 선언은 독일 국민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지시는 황제, 즉 카이저가 아닌 바이마르의 듣보잡 정권이 내린 일이었다.

독일 국민들은 패배같지 않은 패배 속에서 치루어진 베르사유 조약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골자로 한 이 조약은. 민족들의 자주와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결과로 같은 동맹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사분오열로 잔뜩 쪼개지고 갈라져 버렸다. 그러나, 독일에게는 폴란드에게 양도된 단치히 등의 일부 영토와, 보불전쟁 이후 독일이 승전의 대가로 가져갔던 영토인 '알자스-로렌'지방 역시 도로 원래 주인인 프랑스에게 넘어갔다.

아예 제국 자체가 공중분해된 다른 동맹국과는 달리, 독일은 전 국토의 10% 가량 되는 영토만을 잃었을 뿐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보오전쟁, 그리고 보불전쟁을 거쳐가며 이루어진 무적 독일군의 불패신화가 깨져버린 고통과 함께, 산산조각난 통일제국의 영토는 독일 국민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마르의 공화국 정부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과 함께. 이와 같은 굴욕적인 조건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고, 바이마르 체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더구나,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는 그 용어를 만든 미국 역시 필리핀을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으며, 영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이 패전국만의 민족자결주의는 아시아에서 급격히 팽창 정책을 추구하던 일본의 발목을 전혀 잡지 못하였다. 이 미국의 실수는, 1941년에 하와이에 내린 불벼락으로 곪아터지게 된다.

또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음모론이 떠돌아다녔다. 그들 중 메이저한 음모론은, '배후중상설'으로. 이길 수도 있던 전쟁을 후방에 있는 유태인과 그들의 유태 자본, 그리고 볼셰비즘으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의 배후에서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었다.

전쟁 말엽에 전쟁을 끝내자고 반전 시위를 벌이는 공산주의자들을 지겹게도 보아 왔던 일반인들에게, 이 음모론은 더욱 잘 먹혀 들어갔다.

야전병원에 독가스 중독으로 최전방에서 후방으로 실려온 한 환자 역시 창문 밖의 반전시위를 내다보게 된다. 그 남자의 마음속에 있던 전쟁 승리에 대한 희망은, 이 배후중상설의 증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봄으로서 뇌리에 각인되게 된다. 이 남자는 다름아닌 '아돌프 히틀러'. 당시 제국육군 소속 상병이었다.

최전방에서 온갖 위험한 일을 도맡아 하며, 독가스까지 마셨지만. 군대에 가지도 않고 반전시위나 해대는 그들을 본 히틀러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광기가 들어차게 되는데...

이 장면은, 어쩌면 1933년에 제국의사당에서 총리로 당선되던 그날. 자신이 그 공산주의자들에게 결국 승리하였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그날까지 그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



Comment : 2


Returne`s puppet | 히틀러를좋아하긴하는데 밖으로표출하기엔망설여지더군요 <br>위대한녀석아닌가요?ㅋ 2015/02/16 23:49:31

광덕이 | 진짜 선전전동에는 아직까지 히틀러를 따라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동양에서야 뭐 표출하셔도 상관은 없지만, 서양(특히 나치에 점령된 적 있는 프랑스 등)에서 히틀러 어쩌고 하다간 욕먹는 걸 넘어서 감옥에 잡혀 들어갑니다. 2015/02/17 00: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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